(스포) 원더 우먼 1984 (Wonder Woman 198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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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
스포일러가 있어요.
사람들이 <스파이더맨2>를 최고의 히어로 영화로 꼽곤 하는데, 어릴적 한번본 저는 왜 좋은 영화인지 몰랐습니다. 서른이 넘어서보니 대중영화중에 인간적 고뇌를 이토록 깊게 다룰수있는 작품은 잘 만들어질수 없는것을 느낍니다. 보편적으로 일반인보다 월등한 재능을 가진 주인공이기보다, 사람대접도 못받는듯 사는 토비의 피터 파커가 더 대중에게 가까운 존재일테죠. 아무튼 스파이더맨 이야기를 집어든 이유는 '이 영화가 뭐가 문제지?'라는 질문을 이어가다보니, 비교대상의 모범으로 <스파이더맨2>가 떠올랐습니다.
다이애나는 드림스톤에 소원을 빌고 스티브와 재회하게 됩니다. 그 대가로 본인의 파워를 잃습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주제의 명과 암이 뚜렷하지 않다는 겁니다. 캐릭터의 욕망은 캐릭터와 관객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이정표이자 '빛'입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사건들과 내적 갈등은 '어둠'이겠죠.
다이애나가 스티브를 그리워하는 동안 얼마나 슬퍼했는지를 영화 초반에 더 분명하게 드러냈어야 합니다. 그래야 스티브와 만났을때 기쁨의 감정이 커집니다. 영화에서 다이애나가 스티브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이 약합니다. 스티브의 시계를 방에 소장하고있거나, 바바라와 말하며 '예전에 사랑을 했었죠.'라며 웃으며 말하는 부분이 전부입니다. '1편의 스토리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해야합니다. 영화 <캐롤>의 주인공 캐롤이 좋은 예입니다. 내면은 고독하지만 그것을 감추기위하여 외면을 치장합니다. 스토리에 깊은 갈등이 없다면 편하게 보기좋은 영화는 되겠으나, 좋은 영화가 된다는 보장은 희박할거라 생각합니다. 인물에게 결핍을 부여해야합니다, 그게 인간의 굴레니까요.
둘째로 스티브와 이별해야할때, 그 간절함의 정도가 약합니다. 다이애나가 맥스로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바바라와 대치하고, 바바라에게 압도당한뒤 다이애나는 무력감에 빠집니다. 스토리 라인은 그렇지만 시민들이 어수선한 상태에서 스티브에게 부축되어나와 걷다가 이별로 돌입합니다. 다이애나에게 소중한 사람이거나, 구하려고 마음먹었던 특정인을 구하지 못해야 무력감의 깊이가 커집니다. 반대로 스티브를 포기하지않으면 당장 누군가를 구할수 없는 급박한 상황이어야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스파이더맨2>를 파헤쳐봅시다. 피터는 스파이더맨의 책임감을 다하느라 메리제인의 연극을 보러가지 못합니다. 타고가던 오토바이는 걸레짝이 되어있고, 극장에 늦게 도착한 피터파커는 냉정한 직원에게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그리고 부서진 오토바이를 끌고가며 벽에 붙은 포스터아 메리제인의 시선을 감당해야합니다. '무력감을 표현하려면 어때야한다.'라는 많은 설명이 필요없지 않은가요?
피터는 히어로의 책임을 다하는것에 고뇌하고, 동시에 능력이 사라져가는것에 병원을 찾습니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사실 히어로의 역할을 맡는것이 본인에게 큰 부담이었음을 깨닫고 일반인으로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앞서 말햇던 '빛'이 강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피터는 수업을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메리제인의 연극에도 갑니다. 지나가는 순찰차를 보고 경쾌한 음악속에서 피터는 여유롭게 빵을 먹습니다. 앞선 메리제인과의 갈등과 히어로에 대한 진정성있는 고뇌를 어둡게 깔아주었기에, 자유를 맛보는 피터의 즐거움이 배가 됩니다.
특히 피터의 자유가 의미있는 이유는 그가 삼촌 벤 파커와의 약속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피터는 꿈속에서 삼촌과 만납니다. 벤은 울먹이며 히어로를 포기하려는 피터를 말리지만, 피터는 벤에게 끝내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어둠이 짙기 때문에 빛도 밝은 겁니다.
기쁨은 잠시, 피터는 화재현장에서 소녀를 구하게 됩니다. 능력을 잃은 피터는 화재속에서 겨우 죽음을 모면하죠. 피터는 소녀를 구해내었지만 다른 죽은 사람이 안에 있었다는 사실에 낙담합니다. 피터는 다시 무력감에 빠집니다. 이것은 자유를 얻으며 맞이한 '빛'과 대조적인 '어둠'입니다.
<스파이더맨2>에서는 피터외에도 닥터 옥토퍼스가 꿈을 향해 직진하며 잃은것들에도 매력이 느껴집니다. 사업의 실패와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또한 기계의 지배에 인격을 잃었습니다. 특히나 멋진것은 영화 후반부에 다다라 인격을 찾은 닥터가 스스로 실험장치를 수장시킵니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능동적'이고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태도이죠.
<원더우먼 1984>는 맥스, 바바라, 다이애나 그들이 잃어버린것과 얻은것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조명해야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스토리의 내부구조이고, 외부구조를 볼때도 구멍이 너무 많습니다. 가령 맥스에게 소원을 비는 대중들에 의해서 어떻게 사회가 혼란해지는지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미사일을 원하는 테러집단, 스타가 되려는 일반인, 시기하는 사람이 죽었으면 하는 사람 등 각자가 원하는 소원을 무분별하게 남발합니다. 이것으로 '사회질서와 도덕이 무너진 상태의 혼란'을 말하려하는데, '사회질서'라는 시스템의 논리 자체가 무형에 가까운것(상대적으로)이라 갈등의 구심점이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대통령의 객기로 핵전쟁에 돌입한 상황만을 갈등으로 가져갔다면, 핵전쟁으로 인류멸망에 치닫는 혼란상태로 가닥을 잡겠지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고 해서 갈등이 되는게 아닙니다.
<디지몬 어드벤쳐: 우리들의 워게임>을 보면 똑같이 핵이 발사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민간인들은 핵이 발사된줄도 모른채 주인공 일행이 나쁜 디지몬을 막느라 고군분투합니다. 두 영화를 보신 분들은 어떤 갈등에 더 긴장감이 있는가요? 결국 같은 상황이어도 구심점이 무엇인가에 따라 의미의 깊이가 다릅니다. 초짜들이 이렇게 합니다. 욕심만 많고 어떻게 만들어질지는 짐작도 못하니, 불안하여 의식의 흐름대로 다 때려넣는겁니다.
맥스가 자신을 드림스톤으로 만든것이나, 대중들이 무분별하게 소원을 빌면서 벌어지는 카오스 상태는 스토리적으로도 의미가 떨어질뿐더러 그것에 대한 표현을 감당할수 없습니다. 감당할수 있는 감독이 없을겁니다.
또한 사소한 설정들을 볼때에서 관객에게 불친절합니다. 능력을 잃어가며 상처를 입는 다이애나를 보면서 개인적으론 의아했습니다. 피부에 총알이 직격이면 상처를 입기에 굳이 팔로 총을 막는것인지, 아니면 능력이 없어지는것인지 불분명했습니다. 그 변화에 의미가 있는것이라면 상처를 입고 아파한다든가, 상처에 대한 시선을 카메라 연출로 주었어야 합니다.
황금갑옷에 대한 설정도 무책임합니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이미 날수있는 캐릭터에게 날개를 날아준것은 의미가 없죠. 방어수단으로서 의미기 있는것인데 무엇을 지키기위해 의미가 있는것인지 의문이고, 지켜지지도 않죠. 고양이 한테 찌그러져서 날개를 버리는 것을 멋으로 삼기위해 의미없이 집어넣어졌습니다. 그리고 왜 바바라는 물속에서 감전이되고 다이애나는 멀쩡한것인지? 루피인가요?
하아.. 그리고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정신나간 여자가 춤추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맥스가 통신기지에서 대중들의 소원을 들어주며 열렬하게 응원하는 장면 말입니다. 처음엔 '터치'라고 표현하길래 손을 맞잡아야만, 신체적 접촉이 있어야만 맥스와 소원을 거래할수 있는것인가 했습니다. 일방적으로 맥스의 얼굴을 스크린을 통해 보아도, 소원을 빌수 있는것이었습니다. 결국 기존대로 광고를 찍었어도 그것은 가능한것 아닌지?
소원이 이루어지느라 발생하는 바람때문에 다이애나가 접근할수 없는 모습은 정말 유치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만화 <블리치>에서 아이젠 소스케의 영압때문에 엑스트라 캐릭터들은 육체가 증발해버리는 모습이고, 만화 <원피스>에서 샹크스의 패기에 주변 캐릭터들이 기운에 억눌리는 모습입니다. 위압적인 기운에 압도당하는 후까시 잔뜩넣은 겉멋은 소년 만화에나 나올법한 모습이라는 것이죠.
사실 영화는 불쾌하기보다 무덤덤하게 봤습니다만 하나, 둘 딴지를 걸자면 끝이 없네요. 사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구멍이 느껴지는 작품들은 스토리공부를 하는것에 도움이 된다고는 느낍니다. 물론 비판과 창작은 전혀 다른 분야죠.